과거의 나는 정말 멋진 놈이었다. 음악 하려고, 그림이랑 영상이나 만드려고 밤을 샌 건, 밤을 새며 사는 놈이었다. 지드라이브에 아직도 남아있는 고등학생 시절의 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이 녀석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이런 사운드를 만들었어?' '이 신스는 어떻게 만든 거지?' '캬, 사분의 칠 박자, 정말 좋았지 이 노랜.' 옛날의 내 창작물을 보고 감탄하는 건 누구나 한 번씩 있을 법한 감정이라 믿는다. 하지만 여러분, 그자에게 패배감을 느낀 적은 있는가? 나는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을 책임지는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제 스스로 일어나기 위해 일찍 자야하며,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하고, 스스로를 키우기 위해 일을 해야 한다. 한 마리의 갈매기처럼 판지의 푸른 해수면 위를 가로지르던 난, 이젠 외딴 내륙에서 쳇바퀴를 쳇바퀴가 아닌 것처럼 굴리고 있다. 아니, 그러려 노력하고 애쓴다. 난 이제 더 이상 갈매기의 시를 읊지 못할 것만 같다. 더 이상, 더 이상 그때처럼 날지 못하고, 심지어 나는 것이 앞으로 더 힘들어질 거란 생각에, 나는 치욕스럽고 절망스러운 기분에 잠길 뿐인 것이다. 나 한평생 질투심 느낀 적 없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하지만 여러분, 난 어제 새벽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사랑하지 않겠지만, 내게는 마치 내 발을 간지럽히던 바닷거품의 냉기처럼 간드러지고 날카로운, 그래서 사랑스러운 소리인 것이다. 삼 분 내지 사 분의, 그것을 들으며, 난 따라갈 수 없는 남의 재능을 처음으로 느꼈고, 그건 날 절망스럽게 했다. 과거의 난 소통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 멀리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스위스에 사는 샘 스미스 씨와 비슷하다. 그자의 기록을 통해 난 간접적으로라도 그의 삶을 비춰볼 수 있지만, 내가 그에게 마음을 전할 방도는 없다. (적어도 향후 몇백 년간은) 정보의 일방향 통신은 소통이라 부를 수 없다. 세 번의 악수 없인, 진정한 소통은 없다. 그래서 내가 소통할 수 없는 그를, 내 과거를, 내가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너무나 거대한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가. (큐브릭의 ■) 어쩌면 더 이상 멋지게 날지 못하리라고, 그런 서글픈 현실을 받아들일 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아직 바위를 삼키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아직 노래하고, 아직 연주하고, 아직 쓰고 그린다. 이런 내 마음이 참 간절한데도, 유튜브 몇 시간이면 금방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 참 한심하고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