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개발 중인 프로젝트,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밤을 새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그것들이 영화처럼 계속 틀어지고, (이게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점인데,) 실제 영화관과 다르게 그 속에서 잠드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들이 어쩌면 내가 무의식 중에 무언갈 열망하고 있기 때문에 계속 피어나는 건 아닌가 생각한다. 별처럼 뜨겁게. 눈부시게. 태양빛은 눈을 감아도 보인다. 따라서(∴), 나는 눈을 뜨고 창문을 바라본다. 그저 가만히 누워 고개를 드는, 머리칼이 베개를 긁는 소리를 내는, 그런 별 의미 그런 것 없는 동작. 그러나, 누운 머리 위에 펼쳐지는 흐릿하고 그윽한 남빛 하늘(그리고 그 하늘의 검은 혈관)은 어렸을 적 내가 지녔던 '팽창하는 태양에 대한 공포'를 떠올리게 했다. 그 뿐인가. 저 하늘의 도시와 달빛이 산란되어 그려진 색 뒤엔 무서울 정도로 늙어버린 수억 년 전의 빛이 이제야 우리 집에 찾아와 창문에 노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많은 할머니의 얼굴이 형태를 알 수 없도록 덕지덕지 그려진.) 어렸을 적엔 이런 것들을 벌벌 떨며 무서워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보다 종이 위의 숫자들에 더더 떨고, 이런 내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을 간간히 하곤 한다 난. 그래서 난 우주나 하늘보다 지금 내 방 안이 더 우주같다 하며 느낀다. 큐브릭의 그 영화를 보면, 우주는 고요하다. 이 방도 고요-하다. 창문 밖 세상보다 더. 반대편 침대에서 간간히 코를 고는 룸메이트의 코골이는, 내 요란한 생각에 묻혀 잊혀진다. 귓구멍에 들어가다 잊혀져 사라진다. (이런 경험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가지는 나다.) 내 생각도 귓구멍에 들어가다 사라질 뻔 했지만, 다행히 지금 귓구멍-뒷목-오른 승모근-어께-(생략)-손끝-샤프 손잡이-종이라는 도체들의 시리즈를 통해 글씨로 안착하고있다. 하지만 활자들은 고요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자기기가 높은 음으로 모스부호를 보내고 있다. 공유기가 아닐까. 공유기는 전해져 오는 말만 한다. 가끔 팔공팔공 포트를 통해 간신히 입을 트지만, 보통은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없다. 그런 공유기는 얼마나 자신의 생각을 소리치고 싶을까. 얼마나, 얼마나 괴로울까. 분명 그것의 괴로움이 새어나오는 소리이리라, 이 모스부호는. 하지만 그것의 괴로움은 이 방의 고요를 채울만큼 요란하지 않다. 우주는 조용하다. 이 방도 우주의 일부라 조용한 듯 하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검은 건 피요, 하얀 건 종이니라. 그것의 모스부호도 여전히. 이런 공간 안에서 잠을 자지 않는, 난 참 사치스런 사람이다. 마치 화장실에서 수도꼭지를 잠구는 걸 깜빡하고 나가는 사람과 같다. 지금 잠을 자야 내일 미술관에 상쾌한 마음으로 갈 수 있을텐데. 이 샤프를 놓으면 다시 영화가 시작된다. 그래도 자야지, 자야지, 내일을 위해. 수돗세를 아껴야, 맛있는 밥을 먹을 거 아냐.